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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살면서 미래를 보았던 거인 버트런드 러셀,
그 가장 짧은 지혜의 글들을 만나다

런던통신 1931-1935 (Mortals and Others)      버트런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14,800원

버트런드 러셀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한번은견과 먹는 사람들의 모임명예 간사를 만난 적이 있다. ‘아니 무슨 말씀이세요?’ 그녀가 소리쳤다. ‘폐병으로 온몸이 마비됐던 프라하 사람이 견과 식이요법을 시작한 지 한 달도 안 돼서 체코슬로바키아 헤비급 선수권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는 얘기도 못 들어보셨단 말이에요?’ 나는 헤비급 챔피언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항변하자 그녀는 시험 기간에 함부로 비프스테이크를 먹다가 1등을 놓친 사람들의 사례를 마구 퍼부어댔다. 나무에서 살던 우리 조상들은 나무 열매를 먹고 살아서 놀라운 수학 실력을 가질 수 있었나 보다.”


러셀이 정말 이런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는 그가 만들거나 과장한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 그렇다. 『런던통신 1931-1935』는 러셀의 이야기를, 그것도 매우 웃기는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책이다. 피아노 할부금을 내지 못할까봐 폭동을 일으킨 수병들, 아이들 급식으로 베이컨을 준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 채식주의자 어머니, 정부에 반항하기 위해 휴가 때마다 위스키를 훔치는 병사, 피아노 세일즈맨에게 습격당한 어느 가장의 패배, 파산 위기에 빠졌지만 과자 만드는 요리사 세 명을 포기하지 못했던 귀족의 비스킷 사랑
……. 『런던통신 1931-1935』는 농담 또는 만담 같은 이런 이야기들을 경유해 러셀 특유의 비판적인 지혜에 도달한다.



암흑의 한가운데에서 희망을 발견하다
 

『런던통신 1931-1935』는 러셀이 1931년부터 1935년까지 미국 허스트 그룹 계열 신문들에 기고한 칼럼들을 모은 책이다. 1930년대 초반 러셀은 죽은 형을 대신해 세 명이나 되는 그의 전처들에게 위자료를 지급하고 결국 실패로 끝난 실험학교를 경영하느라 살림이 매우 힘들었다. 그 때문에 원고료가 1년에 1,000파운드나 되었던 이 일자리가 매우 유용했는데, 4년 만에 연재가 끝난 것은 러셀이 휴가를 함께 보내자는 허스트의 제안을 거절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허스트는 영화 <시민 케인>의 모델이었던 전설적인 언론 재벌이다. 그는 아내였던 여배우 마리온 데이비스에게 선물로 사준 저택에서 찰리 채플린이나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같은 유명인사들을 초대해 함께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러셀이 직접 쓴 이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는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이런 사연으로 러셀은 자신의 저서 중에서 보기 드물게 대중적인 책을 남기게 되었다. 러셀은 자서전에서 실험학교의 실패와 두 번째 이혼 등을 겪었던 1930년대 초반이 매우 힘든 시기였다고 고백했지만, 『런던통신 1931-1935』에는 그런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 글들에 그늘이 있다면 그것은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곤란을 겪었던 개인적인 고난의 흔적이 아니라 그에게 파국을 예감하게 했던 시대가 남긴 흔적이었을 것이다. 1930년대는 대공황과 파시즘과 나치즘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러셀은 훗날 자서전에서 양차 대전 사이의 기간, 세계는 광기에 이끌렸다.”는 말로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권력을 장악했고 미국을 습격한 대공황이 유럽 전역으로 확장됐던 그 시대를 회고했다. 그 후 80년이 지났지만 그 시대의 어둠은 아직 걷히지 않았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아직도 누군가는 전쟁을 원하고, 누군가는 가난한 사람들이 계속 가난하기를 원하며, 누군가는 소수자들이 모든 권력으로부터 소외되어 변방에 머무르기를 원한다. 러셀은 때로는 논리학의 체계를 재정립한 학자다운 이성으로, 때로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다운 필력으로, 그러한 불의의 핵심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어둠을 넘어 자유와 정의와 평화의 빛으로 향하는 길을 발견한다.


그러나 러셀은 시대의 어둠만을 보지 않았다. 런던통신 1931~1935』는 답답한 마음에 바람처럼 불어오는 유머,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을 믿는 낙관과 희망이 가득한 책이다. 러셀은 핵전쟁을 피할 수 없으리라고 굳게 믿으면서도 사람들이 진정 원한다면 평화로운 세상을 건설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던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의 지혜는 단지 세상 뒷면의 진실을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는다. 러셀의 지혜에는 그 진실을 목격하고도 세상을 견딜 수 있게 만드는, 언젠가는 괜찮아질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는 길을 찾지 못하는 이들을 안내하고 투덜거리는 이들의 등을 밀어 세상에서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날마다 조금씩 즐거워지도록, 그리고 지혜로워지도록 

 

런던통신 1931~1935』는 러셀이 남긴 어떤 책보다도 쉽고 친근하고 유머 있는 책이다. 신문 칼럼인 탓에 네 쪽을 넘는 글이 거의 없는 이 책은 에세이별 분량도 적고 소재도 일상에서 찾은 것들이어서 러셀의 명성 때문에 오히려 부담을 느꼈던 독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러셀이 다룬 소재들은 우리 모두의 생활과 맞닿아 있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은 필요 없는 물건을 사라고 강요하는 판매원에게 시달려본 적이 있을 것이다. 러셀은 우리는 사고 싶지 않았다」에서 휴가를 가는 대신 그랜드 피아노를 사야 한다고 주장하는 강도에게 습격당한 가장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피아노를 놓을 공간이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하지만 강도는 벽을 조금만 헐면 거실에 놓인 피아노의 꼬리가 멋진 침실로 튀어나오게 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 처량하면서도 웃긴 이야기의 결말은 생산과 소비의 관계가 역전되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의 악순환을 향한 비판이다. 이런 글을 몇 편 읽다보면 러셀이 이 소소한 에피소드 끝에 어떤 사색을 남겨두었을지 호기심과 기대를 품게 된다.


이처럼 사소한 일상의 의문을 통해 가려진 세상의 진실을 드러내고 깊은 지혜를 전하는 러셀은 조롱 섞인 유머와 풍자의 대가이기도 했다. 러셀은 런던통신 1931~1935』에서 몇 번이나 미국의 거부 록펠러를 언급하지만 노동자를 착취하거나 경쟁자를 시장에서 축출하는 그의 경영 방식을 직접 공격하지는 않는다. 대신 러셀은 독자로 하여금 그와 함께 웃는 사이에 스며들 듯 록펠러의 실체를 깨닫도록 만든다. “존 록펠러 씨는 재산이 얼마 없는 가정에서 자란 것을 자신에게 내려진 축복 중 하나로 꼽는다고 회고록에서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자기 자녀들은 이런 축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느라 애써왔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 시대 많은 재벌들이 구사하는 화법이기도 하다.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책 한 권을 필요로 하는 사람도 있지만 단 한 마디의 말이면 충분한 사람도 있다. 러셀은 낭비와 우회가 필요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신문 칼럼에 들어갈 원고지 몇 장만으로도 전쟁에 열광하는 정치가들 때문에 대중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메시지를 민담처럼 재미있게 전할 수 있었다. 아마존의 어느 독자는 이 책을 읽은 사람은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보다 좀 더 현명하고 괜찮은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라는 서평을 남겼다. 그 평을 런던통신 1931~1935』의 에세이 하나하나에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을 읽는 독자는 글 한 편 한 편을 읽을 때마다 조금씩 더 현명하고 괜찮은 사람이 되어갈 것이다.”라고 말이다.

 


 글 | 교양학술팀 동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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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cked from 신민식 독서노트   2014/04/08 20:39 Delete

    런던통신 1931-1935 - 버트런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사회평론 버트런드 러셀이 쓴 글이라서 곧바로 샀다. 책이 도착해서 보니, 우와 정말 두껍다. 500여 쪽이다. 만족감 충만! 이 책은 러셀이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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